걸으면 종아리가 아파 멈춘다면 — 말초동맥질환 파행 증상
"나이 드니까 다리가 아픈 거죠." 조영실에서 말초혈관 시술을 앞두고 이 말을 정말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패턴이 너무 또렷합니다. 200m쯤 걸으면 종아리가 아파서 멈추고, 2~3분 서 있으면 괜찮아지고, 다시 걸으면 또 비슷한 거리에서 아프고. 이건 나이 탓이 아니라 혈관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간헐적 파행이란
말초동맥질환(PAD)은 다리로 내려가는 동맥에 동맥경화가 쌓여 혈류가 줄어드는 병입니다. 심장 혈관에 생기는 일이 다리 혈관에 똑같이 생긴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만히 있을 때는 근육이 쓰는 산소가 적으니 좁아진 혈관으로도 그럭저럭 버팁니다. 그런데 걷기 시작하면 근육이 더 많은 피를 요구합니다. 좁아진 길로는 그만큼 못 보내니 근육이 산소 부족을 느끼고 통증이 생깁니다. 멈추면 요구량이 줄어드니 통증이 가라앉습니다. 이 반복되는 패턴이 간헐적 파행입니다.
아픈 위치가 막힌 곳을 알려줍니다
통증이 나타나는 부위는 대개 막힌 혈관보다 아래쪽 근육입니다.
- 종아리가 아프다 — 가장 흔합니다. 허벅지의 대퇴동맥이나 무릎 뒤 오금동맥 쪽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 허벅지와 엉덩이가 아프다 — 골반 안쪽 장골동맥처럼 더 위쪽이 좁아졌을 가능성을 봅니다.
- 발바닥이나 발이 아프다 — 무릎 아래 가느다란 혈관들이 막힌 경우입니다. 당뇨가 있는 분에게 이 패턴이 상대적으로 흔합니다.
허리 디스크·척추관협착증과 헷갈립니다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는 점은 척추관협착증도 마찬가지라, 정형외과에서 오래 치료받다가 뒤늦게 혈관 문제로 밝혀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구분에 도움이 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 쉴 때 자세 — 혈관 문제는 서서 쉬어도 좋아집니다. 척추 문제는 허리를 굽히거나 앉아야 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회복 시간 — 혈관 문제는 대개 몇 분 안에 확실히 가라앉습니다. 척추 문제는 더 오래 끌거나 자세에 따라 오락가락합니다.
- 자전거 타기 — 척추 문제는 상체를 숙이는 자전거는 편한 경우가 많지만, 혈관 문제는 자전거를 타도 다리가 아픕니다.
- 동반 소견 — 혈관 문제라면 발등이나 발목의 맥박이 약하거나 잡히지 않고, 다리 털이 빠지거나 발톱이 두꺼워지고, 발이 유난히 차가운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두 가지를 함께 갖고 계신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확인 검사가 필요합니다.
ABI — 신발과 양말만 벗으면 되는 검사
말초동맥질환을 확인하는 첫 검사는 ABI(발목상완지수)입니다. 양쪽 팔과 양쪽 발목의 혈압을 재서 그 비율을 계산하는 검사로, 아프지 않고 10분이면 끝납니다.
정상이라면 발목 혈압이 팔 혈압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습니다. 다리 혈관이 막혀 있으면 발목 쪽 압력이 떨어져 비율이 낮아집니다. 대체로 0.9 이하면 말초동맥질환을 의심하고 추가 검사로 넘어갑니다. 반대로 당뇨나 만성 신장질환으로 혈관 벽이 딱딱해진 분은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올 수 있어, 이럴 땐 발가락 혈압을 재는 등 다른 방법을 씁니다.
ABI에서 이상이 보이면 도플러 초음파로 어느 구간이 좁은지 보고, 시술을 고려하는 단계라면 CT 혈관조영이나 저희 조영실에서 하는 카테터 혈관조영으로 혈관 지도를 정밀하게 확인합니다.
다리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리 동맥에 동맥경화가 있다는 것은 온몸의 동맥에 같은 일이 진행 중일 가능성을 뜻합니다. 실제로 말초동맥질환이 있는 분들에서 관상동맥질환이나 뇌혈관질환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말초동맥질환 진단은 다리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장 검사, 경동맥 검사를 함께 권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다리 통증이 심장을 미리 살펴볼 계기가 되는 셈입니다.
파행보다 훨씬 급한 단계 — 중증하지허혈
혈류 부족이 더 진행되면 걷지 않아도 아픈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때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안정 시 통증 — 특히 밤에 누웠을 때 발가락이 타는 듯 아프고,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려뜨리면 좀 나아짐(중력으로 피가 내려가서)
- 낫지 않는 상처 — 발가락이나 발뒤꿈치의 작은 상처가 몇 주가 지나도 그대로이거나 커짐
- 색 변화 — 발가락이 검게 변하거나 창백해짐, 발이 차갑고 감각이 무뎌짐
치료는 어디서 시작하나요
파행 단계라면 시술보다 먼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 금연 — 말초동맥질환에서 흡연은 가장 강력한 위험요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연 하나가 다른 어떤 치료보다 큰 차이를 만듭니다.
- 운동요법 — 아플 때까지 걷고, 쉬고, 다시 걷는 방식을 반복하는 감독하 운동요법이 보행 거리를 늘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아프다고 안 걸으면 오히려 나빠집니다.
- 약물치료 — 항혈소판제, 스타틴, 혈압·혈당 조절. 다리 증상뿐 아니라 심장·뇌 사건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 큽니다.
이런 치료에도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증상이 남거나, 상처가 낫지 않는 단계라면 말초혈관성형술(PTA)이나 우회수술을 고려하게 됩니다.
다리가 보내는 신호를 나이 탓으로 돌리는 동안, 같은 일이 심장과 목에서도 진행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걸을 때 아픈 종아리는 다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